안녕하세요. 김이카루스입니다.
최근 이스라엘 - 하마스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로인해 여러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이 어떤 이유로, 고향인 이스라엘을 떠나
유럽 곳곳으로 이동하였는지, 또 어떤 이유로 유대인들은 핍박을 받았는지,
어떻게 반유대주의가 생겼는지 드레퓌스 사건과 함께 안내해드리고자 합니다.
반유대주의란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발생하게 된 것인가?
유대인들은 고대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된 이후부터 유럽으로 이주하여 거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만해도,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다신교'를 믿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보통 어떤 다신교를 믿는 국가들은, 다른 다신교 또한 배타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를들어, 그리스에서 여러 신을 숭배하였고, 이집트에서도 다른
여러 신을 믿었으나, 서로를 핍박하려고 하기보다는 "아~ 이집트 애들은 저런 신을 믿나보네?"
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인데,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고,
또 이스라엘민족, 즉 선택받은 유대인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이 이주한 이후에 기존 거주민들과의 사이에서 크게 분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고대 역사로보면 이런 식으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증오가 야금야금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후, 유럽에 기독교가 퍼지게 된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계속하여 탄압을 받았고 유럽은 자국의
농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유대인들이 농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상업, 고리대금업 등 유럽 사회에서 멸시당하는 '돈'을 다루는 일에만 종사
할 수 밖에 없게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쁜 유대인의 이미지는 더욱 나쁘게 되고, 반유대주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해당 사건은 1894년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인데,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 '보불전쟁' 치르렀으나,
독일에게 패배하고 유럽의 패권을 독일에게 넘겨준 상태였습니다.
프랑스는 로마 이후로는 유럽의 패권을 몇백년간 유지하고 있었던 상태였으니, 프랑스인들은
이러한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입니다.
프랑스는 외적으로는 유대계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었으나, 보이지 않는 유대계에 대한 차별은
당시에도 있었으며,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극단적인 국수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프랑스 육군 정보국은, 프랑스의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편지를 발견하는데,
발신인은 익명(암호명:'D')이었으며, 수신자는 독일 대사관의 슈바르스코펜이라는 육군 대령이었습니다.
해당 문서에서는 '포'에 관한 기밀 내용이 누설되어 있었으므로, 포병 출신의 참모이고,
편지에서 나온 발신인의 암호명이 D였기 때문에, 성씨가 D로 시작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육군 정보국은 생각하였고, 이에 딱 맞는 사람이 바로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였습니다.
드레퓌스는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강압적인 수사와 재판 끝에 드레퓌스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의 섬'에 유배되게 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반전
이렇게 2년간 투옥되어 있던 드레퓌스 사건은 1896년 피카르 중령이 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우연히 관련 문서를 열람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사건 당시 국방부장관은 드레퓌스 사건을 은폐하고자, 관련된 모든 증거를 없애라고 정보국에
지시했으나, 사건을 주도하였던 정보국 입장에서는 증거를 모두 없앴다간 온전한 정보국의
책임이 될 수 있어 증거를 따로 모아놓았던 것입니다.
피카르 중령이 정보국에 새로 부임하여 근무하던 중, 해당 서류를 열람한 이후, 자체적인 조사를
거친 결과, 드레퓌스가 아닌 방첩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에스테라지' 소령이 진범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좌익언론에서는 드레퓌스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고 에스테라지가 범인이라는 보도를 내었으나,
보수 세력들은 군의 위신이 떨어진다며 오히려 드레퓌스가 유대인 국제 비밀조직에 의해 활동한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또, 피카르 중령 또한 한직을 좌천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고등사건 재심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졸라 또한 이 사건을 맹비난 하였고, 세계 각국의 여론도 좋지않자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1899년도에 재심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재심은 무죄판결로 난 것이 아닌, 유죄이나 사면을 해주는 판결을 내렸고,
수년간의 옥살이로 쇠약해진 드레퓌스는 이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후, 1906년에 다시 최고재판소에서 재심을 진행하고 이 때, 드레퓌스와
피카르 중령(군기밀누설 관련)은 모두 무죄를 선고 받고, 군에도 복권되었습니다.
이후 피카르 중령은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드레퓌스 또한 잠깐의 군생활 이후
전역하였으나,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자 소집되어 군생활을하였다가 중령으로 예편합니다.
1935년경 드레퓌스가 사망한 이후에도, 이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정치계에서
큰 논란거리로 남았습니다.
유대인을 차별한 국수주의자들의 사법횡포라는 의견과
유대인 비밀조직의 압박에 의해 프랑스 사법부가 패배하였다는 의견으로 갈렸습니다.
이러한 드레퓌스의 무죄판결은 오히려 프랑스 내부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의 여파, 반유대주의 강화와 시오니즘 운동
이렇게 끝나게된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내부 국민들이 유대인을 경계하게 되는
반유대주의 현상을 낳게되고,
유럽 곳곳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우리는 결국 동화될 수 없다는
회의적인 시각을 낳게 됩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결국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살아야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고,
독자적인 유대인만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시오니즘 운동으로 번졌고,
결국 이스라엘을 재건하게 됩니다.
오늘은 반유대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드레퓌스 사건이 유대인들과
유럽에 미친 내용, 유대인들은 왜 이스라엘을 떠나 유럽으로 갔는지,
어떻게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하루바삐 이스라엘-하마스 간 전쟁이 끝나 인명피해가 줄기를 기원합니다.
긴글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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